공허한 공유(空儒) 등 못된 선비도 많다고 했다.
19세기 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였다.물론 조선 정부가 무능하지만은 않았다.
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당시 일본 문서들을 보면 일부 정치인들의 ‘정한론을 제외하고는 19세기 말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 속에 한국의 식민지화라는 단어를 찾기 쉽지 않다.내부 문제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결국 을사늑약과 강제합병조약으로 귀결되었다.일본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조선 식민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는가.2090년대부터 인삼은 강원 일부 지역에만 남고.
지난해 상반기(1∼6월) 감척 신청은 4척에 불과했다.한라봉뿐 아니라 천혜향과 레드향으로도 품종을 늘렸다.
재배지 이동은 사과뿐만이 아니다.지난해 기준으로는 오징어 어획량의 3배에 가깝다.